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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성' 복원후 반짝! '충무사' 잠긴채 화장실 오물넘쳐
순천시 문화재 관리 무엇이 문제인가?
 
김학수 기자
 
최근 역사를 왜곡하며 독도에 대한 영유권 침탈행각을 자행하고 있는 일본의 만행에 대해 전국적인 비판의 여론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순천에 있는 왜성복원사업이 부적절하였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거세지고 있다.

▲ 복원된 순천왜성     © 김학수
▲ 복원공사가 마무리된 순천왜성     © 김학수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위치한 왜성은 지난 2005년 남해안관광밸트사업의 일환으로 2007년1월부터 2008년 1월 까지 대대적인 정비와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총 사업비 18억원(국비50%, 도비10%, 시비40%)의 사업비를 들여 전수대, 문지, 해자, 탐방로, 주차장 등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왜성과 같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정운장군, 송희립 장군을 함께 모시고 배향하는 사우(祠宇 제사를 모시는 집)인 충무사(忠武祠)에 대한 관리는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충무사의 이정표는 마을 민가의 담벼락에 화살표 지시도 없이 세워져 있으며, 충무사 주변에는 잡초가 우거져 쓰레기가 난무하고 있으며, 탐방객이 이용하는 공중화장실 변기는 막혀 오물이 가득한 채 벌레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 충무사 외삼문     © 김학수
▲ 충무사 안내 표석     © 김학수
▲ 충무사 안내 표지판     © 김학수
▲ 굳게잠긴 충무사 외삼문     © 김학수
▲ 충무사 화장실 / 현실보도를 위해 모자이크 처리를 하지않았다.     © 김학수
 
충무사 인근 마을주민 박모씨(50)는 학생들이나 참배객들이 충무사를 찾아왔다가도 문이 잠겨져 있어 불만을 성토하고 있다며, 충무사의 관리체계에 대해 여러 번 민원을 제기하였지만 한 번도 관철된 적이 없었다고 했다.

박씨는 왜성은 신성리 사람들에게는 비통한 일제의 상징물인데 정부에서 왜놈들이 쌓은 왜성을 복원한다고 번듯하게 돈으로 발라놓았지만 정작 충무공의 호국정신에는 눈 먼 행정을 펼치고 있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순천시 문화재계 담당자는 왜성의 복원사업은 정부시책이었다고 일관하며 복원 과정에서 일본인 전문가의 구조물에 대한 자문을 통해 왜성의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고 말했다. 충무사는 도지정문화재 자료 48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사유지로 되어있어 관리의 한계가 있다며 관리는 (사)순천지역 충무공유적 영구보존회에서 하고 있고 다만 순천시는 문화재의 보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시공업자에 공사를 의뢰하고 있다고 말해 문화재 관리의 헛점을 내 보였다.

이를 토대로 충무사에 대한 순천시의 문화재 보수 현황을 파악 해 보니 2004년 외삼문 보수 및 주변정비 사업으로 7천3백만원, 2007년 화장실 보수사업비로 2천8백만원의 사업비가 지출되었지만 현재의 충무사 관리 실태는 엉망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다고 하지만 인근 여수시에 있는 충민사의 경우는 순천시가 본받아야 할 정도로 문화재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순천시는 최근 순천만이 국가명승 제41호 지정 되는 등 모든 문화재의 자격요건을 골고루 갖춘 도시라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그러나 홍보를 위해 문화재의 지정에만 급급하였지 현존 해 있는 문화재의 관리는 뒷전이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충무공의 얼이 서려있는 순천에는 어디를 찾아봐도 아직까지 충무공 동상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국가예산으로 실시된 왜성의 복원사업이었다 할지라도 국민의 정서에 맞는 사업 추진이었는지를 한번쯤 되짚어보았어야 옳았었고 막대한 예산을 호국의 얼이 깃든 문화재에 대한 관리부분에 지원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근에 발간된 ‘충무사지’의 축간사 내용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의 흔적을 후손에게 왜곡없이 전달하여 부끄러운 과거는 교훈으로 삼고 자랑스러운 일은 자긍심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사명이다.

순천시는 역사적인 고증을 통하여 이순신 장군과 지역주민들의 피와 땀이 담겨있는 충무사, 검단산성, 순천왜성 주변을 정비. 복원함으로써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속에서 우리지역이 차지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후손에게 알리고자 한다.“

최근 경상남도에서는 이순신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러일전쟁(1905)때 일본 해군제독을 지낸 ‘도고헤이하치로’의 유적을 복원하려다 사업을 전면 취소하는 일이 있었다. 순천 왜성을 통해 일본인 관광객이 어느 정도 순천을 찾아올련지는 모르겠으나 호시탐탐 건국주의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일본의 야욕스러운 웃음에 우리가 박수를 쳐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우리의 생각이 필요한 때이다.

왜성은 어떤 곳 인가?

1592년 임진년에 우리나라를 쳐들어왔던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다가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수군과 의병, 그리고 조,명 연합군에 의해 패퇴를 거듭하는 신세가 되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왜군은 1593년 휴전을 제안하게되었는데 3년간에 거쳐 진행된 휴전을 위한 회의는 결국 왜군의 군사력을 재정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뿐 1596년 회의는 결렬되고 왜군은 또 다른 침략을 감행한다. 1597년에 시작된 왜군의 침략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임진년 침략의 패배원인이 전라도를 장악하지못한 원인이었다고 판단 한 왜군은 전라도를 집중 공격하여 남원성 마져 장악하고 서울 근처까지 진격을 하게 된다. 그러나 또다시 조, 명 연합군에 의해 패퇴하여 밀리기 시작한 왜군은 일본과 가깝고 병참 보급이 용이한 지역을 찾아 전열을 가다듬게 되는데 최후의 방어선으로 웅거하려 했던 곳이 울산과 순천을 잇는 남해안 800리(320km) 였다.

그리하여 왜군은 경상도 일대와 순천등에 28개의 성을 쌓고 웅거를 하게되는데 특히 왜군의 주력부대라고 할 수 있는 소서행장이 성을 쌓고 1만2천명의 왜군이 주둔했던곳이 바로 순천왜성이다. 당시 광양만에는 노루섬(장도)에 명나라 해군제독이 진린이 이끄는 1만명의 군사와 솔섬(송도)에서 충무공이 이끄는 수군6천명, 그리고 왜성의 후방 3km 지점인 검단산성에 명나라 육군 유정장군이 이끄는 6천명의 군사와 조선 육군 도원수, 권율장군이 이끄는 약 8천명의 육군이 집결하여 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갈수록 전세가 불리해져 위기감을 느낀 왜군은 명나라 해군제독 진린을 뇌물공세로 유혹하게되고 결국 진린은 왜군에게 퇴로를 터주게 된다.

퇴로를 통해 왜군 연락병이 경상도 사천에 있는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왜성을 향해 진격해오는데, 충무공은 전투의 전략으로 싸움터를 유인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노량 앞바다이다. 결국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은 전사(11월 19일)를 하게 되고 살아남은 왜군은 일본으로 모두 후퇴하여 7년동안 계속되었던 임진왜란은 끝나게 된다.

왜성은 왜놈이 쌓았다고 해서 왜성(倭城), 왜교성(倭橋城), 예교성(曳橋城)이라고 불렀는데 당시 왜군들은 신성리성 이라고도 하였으며, 광해군때 순천부사로 부임한 지붕 이수광은 망해대(望海臺)라고 이름 짖기도 했다.

왜성은 40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상당부의 성곽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내성의 높이4m, 외성의 높이5m, 성곽의 둘레는 약 3km, 성안의 면적은 약 96,710평이다.

1934년에 제정된 조선 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에 의거 1938년 사적으로 지정되어오다가 1962년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국가사적 제49호로 승주 신성리성으로 승계되어 왔다.

하지만 1996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일제 강점기에 지정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를 실시한 결과 국가사적에서 해제되었고 이때부터 왜성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도지정문화재로 지정을 권고하였다. 이에 순천시는 1997년 3월 4일 전남도에 왜성을 지방문화재로 지정 해 줄것을 건의하면서 주민들의 민원과 주변 공단건설 등의 이유로 지정면적을 축소하여 37,858평(125,143㎡)만 신청 1999년 2월 시 ․ 도기념물 171호로 지정되었다.

충무사는 어떤 곳 인가?

옛 격전지인 신성리에 사당이 선 것은 임진난 이후 약 100년쯤 후의 일이다.

이때만해도 이곳에 사람들이 아직 살지 않았다. 마침 달성서씨, 전주이씨, 김해김씨 등 세 성씨들이 이곳에 처음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는데 밤이면 임난 당시 죽은 왜귀들이 주창을 들고 나타나 집단적으로 소란을 피워 불안하고 무서워서 밖을 내다 볼 수도 없었다.

이 왜귀들을 몰아내기 위해 세 성씨가 논의한 끝에 제물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내주자는 의견, 무당을 불러 굿을 하자는 의견 등이 있었으나 왜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충무공의 신당을 세워놓으면 어떠한 기적이 일어날것이라고 생각하고 토석으로 사당을 세우고 무서운 표정을 한 충무공의 영정을 그려 모셨다.그랬더니 왜귀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1944년 왜경들이 사당을 파괴하고 방화하여 사당이 소실되었는데 연기가 하늘로 치올라 하루종일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광복 후 초대 군수인 김양수의 제의로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충무공유적경모회 등이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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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7/24 [17:46]  최종편집: ⓒ 전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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