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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히는 박정희 (5회)
월남파병과 김일성 3대혁명론-중공·북한의 혈맹조약은?
 
김동문 기자
 

1961년 7월. 중공과 북한 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소련. 중공. 북한이 이루는 북방 삼각세력의 팽창 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어 62년12월 김일성이 4대군사노선을 발표했다.


64년 중공이 핵실험을 성공하고 65년4월 김일성이 "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 혁명론을"발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의 입지는 약화되어 갔다.


월남전의 확전으로 인해 미국의 남한에 대한 원조를 삭감하는 한편 주한 미군을 월남전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정서가 확산됐다.


북한은 공세의 고삐를 바짝 조여 가고 미국은 발을 빼려하고 한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고 월남마져 공산화 되면 다음차례는 한국이었다.


실로 월남전은 한국제2의 전선이었다. 전 거물간첩 김용규씨는 그의 저서<소리 없는 전쟁>(1999.원민)81쪽에서 4.19를 이렇게 회상 했다.


"4.19때도 시위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시끌벅적 거리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학생 시위를 지도 했습니다"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박사. 중앙일보 논설위원)는 그의 저서(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에서 "1972년 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 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썼다. 김용규씨는 이렇게 털어 놓았다. 북한은 4.19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 했다.
 
(1)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정당이 없었고 (2)명확한 투쟁 강령이 없었고 (3) 노동자, 농민의 참가가 없었다. 그레서 1964년 서울에서 발족 된것이 "통일 혁명당 창건준비위원회"였다.
 
이 준비 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 "민족해방전선"을 두고 합법적 조직으로 "학사주점" "새문화 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민족주의 연구회"등의 서클을 두었고 당기관지로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사상.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및 노동자, 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 시켰다.<이어 6회>

전남조은뉴스 주필
kjb방송. 한국장애인신문 주필
[주} 뉴스타운 논설위원
(사)월남참전 전우회 전남초대회장(89-91)
5.18실체규명위원회. 고문
 
 
기사입력: 2005/06/17 [10:46]  최종편집: ⓒ 전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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